35년차 한국은행 국장, 은퇴 후 일이 더 설렌다?

35년차 한국은행 국장, 은퇴 후 일이 더 설렌다?

리멤버 Pro:logue

프롤로그는 책·영화의 서막을 가리키는 말이죠. 잘 쓰인 프롤로그는 본편 전체의 감상 수준을 높이기도 합니다. 리멤버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커리어를 완성시켜가는 프로페셔널(Pro)들의 이야기(logue)를 통해, 여러분의 성공 서막을 열어주는 영감과 인사이트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류상철 | 前 한국은행 국장

1988년 한국은행에 입사해 올해 3월까지 일하다 퇴직했습니다. 금융안정보고서 발간, 각종 국제 금융 회의 대응 등을 주력 업무로 담당했습니다. 은퇴 후엔 한은에서의 커리어를 살려 개도국 중앙은행들의 금융 선진화를 돕는 컨설팅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고, 전·현직 동료들과 민간 경제 연구 모임도 운영 중입니다.


천재들만 모인다는 ‘신의 직장’ 한국은행, 이곳에서 35년간 근무하다 올해 퇴직한 한 시니어 은퇴자가 있습니다.

 

“생산가능인구를 아직도 15~64세로 규정하지만 65세 넘기면 일 못하나요? 너무 낡은 개념입니다.”

 

익숙한 경제 용어마저 단번에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만드는 경제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내공이 돋보이는 이분이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전(前) 한은 국장 류상철님입니다.

왠지 모르게 한은 직원이라면 처음부터 일에 미쳐있고 자기 전문 분야를 향해 정진할 것 같죠. 하지만 좌충우돌의 방황기를 보내고 입사 1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뚜렷한 사명과 일의 즐거움을 알았다는데요.

35년도 모자라 은퇴 후에도 더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그의 사명은 대체 무엇일까요? 리멤버가 직접 만나 베일에 싸인 한은의 이모저모와 함께 담아봤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류상철님/리멤버

Chapter. 1
천재들만 모였다는 한은! 어떻게 들어갔을까?

· 중3때 정신 차리고 미친듯 공부 시작
· 한은은 늘 공부하는 조직이란 얘기에 관심
· “발문만 반 페이지… 망친 줄 알았는데 합격”

한은은 천재들만 모인 곳이라 하던데 공부, 솔직히 얼마나 잘하신 겁니까?

처음부터 잘하진 못했어요. (웃음) 부산의 산동네 판자촌에서 자라서 주변 환경, 집안 형편 모두 좋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노점상을 하셨고요. 정신을 차린 건 중학교 3학년 때부터입니다.

그야말로 미친듯이 공부했어요. 집 안에 자리가 없어 마당에 책상을 놨습니다. 밤엔 별빛, 달빛, 가로등 불빛 다 끌어모아 공부했죠. 부산대 경제학과에 진학했고 군 제대 후 경제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3~4학년 땐 과 수석도 하게 됐습니다.

 

“집 안엔 자리가 없어 마당에 책상을 놨습니다. 밤엔 별빛, 달빛, 가로등 불빛 다 끌어모아 공부했죠.”

 

한은에 들어가겠다 마음 먹은 이유는 뭔가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사명감 같은 건 더더욱이요. 공부하는 감을 좀 잡은 후로는 그저 공부하며 안정적으로 돈을 버는 직업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한은도 늘 공부하는 조직이란 얘길 듣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합격하셨나요?

기본적으로 경제학 공부를 열심히는 했지만 합격엔 큰 행운이 따라줬습니다. 취준 당시 지도교수님 덕분에 얼굴도 모르는 어느 한은 선배로부터 편지 1통을 받았습니다.

자세한 입사 절차는 물론 시험 문제 예시까지 적어주셨어요. 42쪽에 걸쳐 말이죠. 당시엔 변변한 기출 문제집 하나 없었거든요. 감을 잡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습니다.

실제 입사 시험은 어떠셨나요?

엄청나게 어려웠습니다. 문항마다 지문 길이가 수십쪽이고 발문만 반페이지가 넘어갔습니다. 경제적 사안을 이론적 모델로써 풀어내라는 문제들이었는데 터무니없는 답만 써내려 갔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도 안 나네요. (웃음)

그런데 나중 얘기지만 저뿐 아니라 대부분이 망쳤다고 생각했다 하더라고요. 저는 그 편지덕에 답안 구색이라도 맞춰서 합격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류상철님/리멤버

Chapter. 2
재벌도 쩔쩔매는 한은맨, 타성과 함께 온 방황

· 첫 부서는 재벌 총수도 쩔쩔매던 은행감독원
· 온갖 향응·접대… 타성에 젖기 좋던 환경 질려 유학
· 경제학 박사 돼 돌아오나 발령지는 철저한 한직

막상 들어가보니 한은은 어떤 곳이었나요?

예상과는 정말 너무 달랐습니다. 첫 발령 부서가 은행감독원*이었는데요. 저는 주로 재벌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 은행감독원: 과거 시중 은행 감독차 한은에 설치됐던 기관. 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 등과 합쳐 1999년 지금의 금융감독원으로 독립

 

“어마어마한 관치의 시대, 향응·접대도 그만큼 팽배했습니다. 여러모로 ‘이건 아니다’ 싶어 딱 5년 채우고 떠났습니다.”

 

재벌을 관리했다고요?

당시엔 재벌들도 시중 은행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은행에 빚을 낼 일이 여러모로 많았죠. 은감원은 은행들의 여신, 즉 돈 빌려주는 행위를 감독했습니다. 사실상의 허가 권한도 갖고 있었죠. 때문에 재벌들이 은행에 돈을 빌리려면 은감원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상상도 힘든 어마어마한 관치의 시대였죠. 온갖 향응·접대도 그만큼 팽배했습니다. 철없던 저도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죠. 근무한 지 4년 정도 된 어느날 친구 한 명이 그러더라고요. “너 너무 거만해진 것 같다”고요.

그때 뭔가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이대론 아무 것도 안 되겠다. 여길 떠야겠다’ 싶었죠. 직무 환경도 타성에 젖기 너무 좋았습니다. 퇴근 후 항상 회식이 있었어요. 자정 전에 귀가한 적이 없었죠. 매일 오전엔 다들 좀비처럼 있다가 오후 4시쯤 돼서야 비로소 일을 시작했어요.

일이 많다거나 도전 의식이 생길 만큼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한 사람이 하는 일을 당시엔 한 부서가 할 만큼 비효율이 심했죠. 여러모로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결국 딱 5년을 채우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유학 시절은 어떠셨나요?

1997년 IMF 사태 직전에 영국 유학을 갔어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IMF 사태는 유학 온 제게도 큰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박사 논문 소재도 한국 외환위기로 정했죠.

<IMF 사태의 핵심 요인은 유동성 위기다>를 이론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으로써 보여주는 내용이었는데요.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한 건 아니지만 추후 어떤 연구를 하든, 제도를 만들든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고해가는 직무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돌아와선 어떤 일을 하셨나요?

2003년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외환전산 담당 부서로 배치됐는데요. 원하던 부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거든요.

왜 그런 곳에 배치됐죠?

어느 직장이든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하죠. 한은에서의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를 굉장히 싫어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귀국하니 그분이 힘을 써서 저를 자기 부서에 배치한 거예요.

부서 내 가장 한직에 꽂았습니다. 죽을 맛이었어요. 천만다행으로 5개월 만에 인사팀에 재배치돼 거기서 2년 정도 있었습니다. 물론 경제와는 무관한 인사 업무를 해야했습니다.

재작년 11월 금융 안정을 주제로 한 한은의 온라인 강의에 출연한 류 전 국장/한국은행

Chapter. 3
입사 18년 지나 찾은 일의 사명! ‘금융 안정 스페셜리스트’로 우뚝 서다

· 맨땅에 헤딩해 가며 금융안정보고서 총괄 제작
· 2008년 기점, 각종 국제 금융 회의 대비 팀 이끌어
· ‘금융 안정 기여’하는 한은 위상 높아진 계기

인사팀 이후엔 어느 부서로 가신 건가요?

금융안정국이란 부서입니다. 제가 가장 오래도록 근무한 곳이기도 하죠. 2006부터 2014년까지 있었어요. 한은에서 뭐 했는지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딱 이 시기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제 한은 커리어 정점을 찍은 곳입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와도 맞물리는 시기였네요.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우선 ‘금융안정보고서’를 총괄 제작한 일입니다. 경제 뉴스에서 종종 들어보신 보고서일 거예요. 2003년부터 지금까지도 반기마다 발간 중이죠. 언론에서 많이 인용해 금융 안정 상황을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요즘엔 직접 찾아보는 분들도 많고요. 한마디로 국민들의 ‘금융 리터러시’를 높이는 역할의 보고서입니다.

제가 업무를 맡은 당시는 발간 초기라 제작이 상당히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제대로 된 틀이 잡히지 않았었거든요. 세계적으로 통화 정책 측면의 보고서는 많았지만 금융 안정 쪽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터라 참고할 만한 정보가 많지 않았어요. 맨땅에 헤딩하듯 정말 노력해 틀을 잡아갔습니다.

그 다음은 국제 금융 관련 회의에 대응하는 일이었습니다. 한은에서 제가 가장 치열하게 일했고 가장 유의미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응을 하셨다는 건가요?

G20*이 2008년부터 정상회의를 시작합니다. 2010년엔 서울에서 정상회의가 열렸고요.

📌 G20: 세계 주요 20국이 회원인 국제기구. 7개 선진국(G7), EU 의장국, 신흥 12국으로 구성

우리나라 공공 부문엔 이게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민간이 아닌 국가가 글로벌 무대에 주역으로 참여한 거의 첫 순간이었거든요.

이 무렵을 기점으로 공공 영역도 선진화 압력을 받게 됩니다. 금융 기관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BCBS(바젤은행감독위)·FSB(금융안정위) 등 각종 기관의 국제 금융 회의에 한국도 처음으로 참여 위원들을 배출하게 된 겁니다.

한은도 이 회의들에 대비할 부서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 팀장을 맡게 됐습니다. 정말 정신 없이, 빡세게 일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고난의 연속이었죠.

 

“저 개인은 물론 우리 한국 금융이 정말 많은 걸 배운 순간들입니다.”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드셨나요?

가장 단순한 예를 들면 다른 나라 위원들의 말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나름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각국 억양이 너무 다양한 데다 테이블 자리 간격도 너무 넓어서 목소리가 잘 안 들리더라고요. (웃음)

하지만 저 개인은 물론 우리 한국 금융이 정말 많은 걸 배운 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BCBS 회의에선 BIS 자기자본 비율*을 정하는데요. 이 비율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여타 내막을 알 수 있었던 거죠.

📌 BIS 자기자본 비율: 은행의 자본 건전성 지표.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BCBS가 정함

각국이 어떻게 금융 논리를 전개하는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등을 생생하게 들어볼 기회였던 겁니다. 한은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원래 한은은 정부 안에선 힘이 없는 조직이란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진국 사이에선 중앙은행의 힘이 엄청 막강한 걸 다들 두 눈으로 보게 됐죠. 물론 다들 교과서적으론 알고 있는 바였지만 피부로 와닿은 건 경제 관료들조차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를 겪고나서야 한은법에 ‘한은이 금융 안정에 기여한다’는 문구가 포함됐습니다. 이전엔 ‘금감원이 있는데 굳이 한은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런데 금융 안정은 중앙은행의 역할이란 게 세계적 인식이더라고요. 그게 반영된 거죠.

모쪼록 이 시기는 거시적인 국가 관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저 개인의 은퇴 이후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경험을 제게 선물했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류상철님/리멤버

Chapter. 4
35년차 한은 국장, 은퇴 후가 더 설렌다고?!

· “경험·역량 축적된 이들이 함께 하면 엄청난 시너지”
· 개도국 금융 선진화 등 각종 프로젝트와 연구 진행
· 시대에 맞게 생산가능인구 정의도 바뀌었으면

올해 퇴임하셨죠.  은퇴를 앞두고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30년차쯤부터 이런 생각이 밀려오더군요. ‘너무 치열하게, 앞만 보며 살아왔구나’ 커리어 중반부턴 거의 단 한순간도 즐기며 일한 적이 없더라고요. 특별한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다 제 욕심 때문이었겠죠. (웃음)

게다가 틀이 거의 정해져있지 않은 대내외적으로 처음 겪는 일들에 마주하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더더욱 없었던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한 적도 많았고요. 그래서 은퇴 이후론 좀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결심이었는데요. 하나는 ‘재미있게 일하자’ 다른 하나는 ‘혼자가 아닌 함께 일하자’였습니다.

은퇴하고도 다시 일을, 그것도 재밌게 하는 게 가능한가요?

은퇴 전 국립외교원서 근무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은퇴 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한 컨설팅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기업 인사 업무를 했던 은퇴자 4명이 모여서 은퇴 이후 커리어를 주제로 탐구하고 컨설팅하는 연구 모임을 하고 있단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느낀 게 많았습니다. 일단 경험·역량을 축적한 이들이 비슷한 고민을 함께 하면 반드시 엄청난 시너지가 난다는 걸 깨달았어요. ‘일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건 역설적으로 은퇴 이후가 아닐까?’ 하는 중대한 생각 전환도 하게 됐고요.

물론 저마다 처지가 달라 일반화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녀들을 다 키우고 부부끼리 소소하게 살아가는 시점이잖아요. 일하는 목적이 돈 자체가 아닐 수 있어서 비로소 너무 절박하지 않은 마음으로, 즐기면서 일해나갈 수 있는 시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은퇴 후 어떤 일을 시작하셨나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2010년대 들어 한국은 각종 국제 금융 회의에 참여해 늦게라도 선진국들의 금융 제도·문화·인식을 직접 교류하며 체화할 수 있었죠. 그러나 개도국들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한은에선 KPP(Knowledge Partnership Program)란 해외 지식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금융 ODA*입니다.

📌ODA(공적개발원조): 선진국이 개도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해 제공하는 각종 지원을 의미. 식량 지원, 재난 구호, 기술 원조가 주된 방식이나 점차 다양해지고 있음

매년 일부 개도국들을 선정해 중앙은행의 핵심 업무인 통화 정책, 금융 안정, 지급 결제 등을 그 나라들에 컨설팅해주는 프로젝트입니다.

여기 공모해 서울대 교수 몇몇과 일하는 중입니다. 올해 8개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 네팔, 카자흐스탄, 우주베키스탄, 몽골)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각 나라에 맞는 컨설팅 참고서를 만들어 전달하는 게 최종 목표죠.

나라마다 문화·사회·정치적 맥락이 제각각이라 그 나라를 깊이 이해해야 맞춤형 컨설팅이 되겠더라고요. 사실 한국도 여타 제도를 선진국 버전 그대로 흡수한 게 아니거든요.

어렵지만 흥미롭고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국제 봉사가 꼭 물질적인 지원만 있지 않거든요. 지식·제도의 성장을 돕는 것도 장기적으로 그 나라에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한국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일례로 카자흐스탄은 자원이 굉장히 풍부한 나라인데요. 디지털화를 국가 차원의 과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각 부처에 ‘디지털 차관’을 둘 정도예요. 현지에선 한국의 도움을 상당히 원하는 중입니다.

ODA를 통해 교류가 더 활성화되면 서로 간의 유망한 협력 가능 지점을 더 많이 발굴하게 될 겁니다. 모쪼록 힘이 닿는 한 계속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겁니다. 물론 매년 공모에 안 떨어진다는 전제로요. (웃음)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류상철님/리멤버

“다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해옵니다. 혼자였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싶어요.”

 

민간 연구 모임도 꾸려가고 계시다고요.

또래 한은 전·현직 동료들과 LUX(라틴어로 빛)란 이름의 경제 연구 모임도 하고 있어요. 올해 5월 예금보험공사한테 ‘기후 리스크와 금융 안정’이란 주제의 연구 용역을 수주해 연구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별탈 없으면 예보가 대외적으로 발간하는 경제 잡지에 곧 실릴 전망이에요. 다음엔 인구 문제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인구 소멸이 문제”라고 외쳐대고 있지만 필요한 이론적 연구는 너무 부족한 상황이라서요.

아울러 전주대 등 지방 대학들과 협력해 이를 지방 공동화 현상과 연계해 다뤄볼 겁니다. 멤버들 모두 자기 전문성에 자부심이 커서 의견이 갈릴 땐 대립도 팽팽하지만 ‘진심으로 즐기며 일한다’는 건 한마음이에요.

누가 시키지도 않고 경쟁이 없어도 저마다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해옵니다. 다들 은퇴 전보다 매일매일 더 설레고 즐거워 하고들 있습니다. 혼자였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싶습니다.

다른 또래 한은 동료들은 은퇴 후 어떻게 살아가시나요?

아무래도 ‘연구’를 평생 업으로 삼았다 보니 대학 강단에 많이들 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게 생산적이거나 재밌는 활동은 아니라고들 합니다. 왜냐면 보통 굵직한 연구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고 홀로 일하기에 그럴 에너지를 내기도 어렵단 거죠. 정식 교수도 아니라 일에 애정이나 학교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힘들고요.

외람되지만 이런 또래 동료분들이 서로 힘을 모아 더 생산적인 일들을 함께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저희 같은 연구 분야 직무자들은 깊이 성찰해 진득히 들여다 봐야할 분야에선 시니어가 주니어보다 여건상 오히려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거창한 얘기일 수 있지만 기후·인구 문제 등 진득한 연구가 필요한 굵직한 국가적 어젠다들도 시니어 연구자들이 모여 탐구한다면 난제를 파훼할 탄탄한 해법들이 나올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류상철님/리멤버

 

“MZ 뛰어넘는 시니어 전성시대 엽시다”

 

은퇴를 앞둔 또래 직장인분들께 남기고픈 말씀이 있다면요?

은퇴식 때 총재님이 소감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걸어온 인생보다 남은 인생이 더 설레고 기대된다”는 거였죠.

우리 바로 이전, 혹은 그 윗 세대들에겐 은퇴란 ‘완전한 커리어의 끝’을 의미했어요. 하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생산가능인구’란 경제 용어 많이 들어보셨을 건데요.

경제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인구를 의미하는데 OECD 기준으론 15~64세로 제한돼 있습니다.그런데, 정말 65세가 넘으면 일하지 못할까요? 아니죠. 제조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이던 시절의 정의일 뿐입니다. 요즘 시니어들은 훨씬 더 오래 일할 수 있습니다.

분명 몸은 늙고 약해지지만 지혜는 훨씬 오래 살아남거든요. 저마다 자기가 알차게 다져온 역량과 경험을 은퇴 이후 더 편하고 자유롭게 풀어내고 즐기면서 일하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MZ 못잖은 시니어 전성시대를 한번 열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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