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의 시대는 한물갔다?

😮 ‘워라밸’의 시대는 한물갔다?

워라밸 워라인

해외 HR 이슈가 국내에 상륙하기까지는 다소 시차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1970~80년대부터 회자된 워라밸이 국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시기도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죠. 그리고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다수 기업과 기관들이 워라밸을 조직문화의 주요 혁신 방향 중 하나로 보고 여러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서양에서는 워라밸과 대치되는 ‘워라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차츰차츰 늘어나고 있습니다.

워라밸 vs. 워라인 

워라인은 ‘Work-Life Integration’의 약자로, 일과 삶이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활을 말하는데요. 워라밸과 워라인 중 무엇이 바람직한가는 여전히 논쟁거리입니다. 

구글은 워라밸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016년 자사 HR사이트 리워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구글러 중 일과 삶을 완벽히 구분 짓는 세그멘터(segmentors)들은 일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인식하는 인티그레이터(Integrators)보다 더 행복했다고 합니다(🔗관련 내용).

반면 워라인을 강조하는 버클리 경영대학원의 부학장 미셸 마르퀘즈(Michelle Marquez)는 “직장, 가정·가족, 공동체, 개인의 안녕, 건강 등 생활을 정의하는 모든 영역 사이에서 더 많은 시너지를 창출하는 접근법이 워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심리적 웰빙 관련 전문가인 스테파니 해리슨(Stephanie Harrison)은 “워라인은 개인의 웰빙을 개선하고 직장에서 그들의 성과를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설명합니다. 

한편 워라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미래학자인 제이콥 모건(Jacob Morgan)도 갈수록 일과 삶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워질 거라고 말하는데요. 그렇기에 그는 일과 삶을 융합하는 노력이 중요해질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일과 삶을 바라보는 통합적 접근 필요 

그렇다면 대체 우리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꼭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걸까요? 다소 김빠지는 얘기일 수 있으나, 워라밸-워라인 모두 본질적으로는 공통된 것을 추구한다는 브리짓 슐트(Brigid Schulte·‘타임 푸어’ 저자)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브리짓 슐트는 “워라밸과 워라인 둘 다 일을 위한 시간과 가족, 보살핌, 인생, 기쁨, 놀이 등 일 외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시간을 동시에 얻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일찍부터 워라인을 강조해 온 와튼스쿨 교수 스튜어트 프리드먼(Stewart Friedman)은 일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사고를 경계합니다. 그는 삶이란 일과 가족, 공동체, 자아 간의 상호작용이며 이 4가지 모두를 동시에 이루는 통합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에게  워라인은 이 요소들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결국 워라밸이든 워라인이든 본질적인 목적은 삶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워라밸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에는 관심 없고, 개인 여가에만 집중하는 이기주의자’로 해석하거나, 워라인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에만 관심 있는 일 중독자’로 바라보는 관점은 각각이 지닌 의미를 부정적으로 왜곡해 해석하는 셈이죠. 

결국 워라밸이냐 워라인이냐는 따지고 보면 중요치 않습니다. 조직문화 혁신을 위해 어느 쪽을 택하든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을 건강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느냐’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담당자들이 집중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직 구성원들이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어떠한 가정을 두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조직이나 구성원의 특성상, 어떤 방식으로 삶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건강한 경험이 가능한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1️⃣ 삶의 요소들에 대한 구성원의 가정 파악 

먼저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구성원들이 어떤 가정을 하고 있는지 파악해 봅시다. 

일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긍정적인 가정 필요 : 구성원들은 저마다 본인의 삶에서 ‘일’을 대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형태에 따라 관점은 제각각이겠죠. 따라서 HR 담당자는 각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일의 정의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일을 ‘일 외적인 요소들의 온전한 경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불가피하게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요소’로 인식하는 경향이 높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요? 이들에게는 일 외적인 삶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긍정적인 가정을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실제 많은 조직에서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일’에 대한 가정입니다. 심지어 다소 거칠게 단정하는 경우도 많죠. ‘일은 행복과 거리가 멀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란 가정이 공유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식으로요. 이는 워라밸-워라인이 가진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자 부정적 해석을 강화시키는 빌미가 됩니다.

삶은 일과 구분될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죠. 결국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추구하는 의미나 가치, 좋은 목적을 실현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 구성원들이 이러한 가정들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면 지금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조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 개인의 삶에서 추구하는 좋은 의미나 목적, 세상에 미치고 싶어하는 좋은 영향과 연결성을 높여주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가정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일 중독과 구분하고 번아웃을 경계해야 : 더불어 ‘일 중독자’를 확인하는 노력도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일 외적인 요소들에 의미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워라인 차원에서 일하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보장해줄 경우, 이들은 일 외적인 요소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마저 ‘직장에서의 업무’에 할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조직 입장에서 결코 건강한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이들이 자신의 업무에서 성취감이나 성장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쉽게 번아웃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 중독자들은 놀이나 취미, 가족, 공동체 등 일 외적인 요소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오히려 조직에서 워라밸 차원의 접근을 통해 일 외적인 요소에서도 의미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합니다.

일례로 ‘임원에게 반강제적으로 연차 쓰게 만들기’와 같은 조직문화 활동을 활용하는 식으로요. 만일 그 임원이 일 중독자 성향이 높다면 이러한 접근들이 매우 유효할 겁니다.

2️⃣ 어떠한 방식으로 건강한 경험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세그멘터와 인티그레이터로 구분되는 걸까요? 조직문화 컨설턴트인 알렉시스 하셀버거(Alexis Haselberger)에 따르면 강력한 경계를 선호하는 이들(세그멘터)은 경계가 없을 경우 어느 한쪽이 자신의 삶 모든 영역을 차지할 가능성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유동적이고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는 이들(인티그레이터)은 스스로가 시간과 공간을 구조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기도 하죠.

업무를 하는 시공간을 통제 여부 : 따라서 우리 조직에 적합한 접근을 선택하는 기준은 구성원 본인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업무의 시간과 공간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 의식’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업무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조직 차원에서 일 외적인 요소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공식적이고 강력한 경계를 만들어주는 ‘워라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반면, 업무 시간과 공간을 구성원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나 업무 특성, 또는 개인 특성을 갖고 있다면 스스로 업무 시간과 공간을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워라인’ 차원의 접근이 더욱 좋겠죠.

업무 유연성 보장 여부 : 마찬가지로 업무에 필요한 역량이나 결정 권한을 가진 이들, 또는 유연한 업무 수행이 가능한 부서의 일원들에게는 워라인 차원의 접근이 보다 적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무역량이 부족하거나 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이들은 주변 동료나 리더와 함께 일하는 시간이 필수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업무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통제하거나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죠. 이들에게는 워라밸 차원에서 일 외적인 요소에 대한 시간을 공식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무척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

조직이 추구하는 조직역량 : 우리 조직이 확보하고자 하는 조직역량에 따라서도 다른 접근을 해볼 수 있는데요. 만일 우리 조직의 사업이나 경영환경이 구성원 각자의 주도성이나 창의성, 민첩성이나 유연함을 기대하는 집단이라면 구성원 스스로 업무에 필요한 결정을 내릴 겁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적시에 필요한 업무행동을 하는 것을 요하겠죠. 이 경우 워라인 차원의 제도나 시스템, 업무환경 구축 노력이 효과적입니다.

반면 우리 조직의 사업이나 경영환경이 고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져야 하고, 성과 달성을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업무 수행시간이 존재하며, 자신이 맡은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역량이 필수적이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워라밸 차원의 제도나 시스템, 업무환경 구축을 통해 구성원들이 일 외적인 요소들에도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겠죠.

그럼 이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봅시다. 워라밸과 워라인, 둘 중 뭐가 맞을까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게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에 불과하다는 걸 아시겠죠? 정말 중요한 건 우리는 과연 지금 일을 포함한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인하고, 우리 조직이나 개인의 특성에 알맞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 안영규 : 조직문화공작소 수석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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