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인·기업들은 왜 열심히 기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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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상인·기업들은 왜 열심히 기부할까?

상자를 든 남성

허난성 홍수와 빅테크 기업의 기부 행렬

지난해 7월, 중국 허난성(河南省) 일대에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51년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300명 이상이 숨지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피해는 인구 1300만명에 달하는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에 집중됐습니다. 황하가 지나는 정저우에서 물난리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피해 원인이 황하 범람이 아닌, 기록적인 폭우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수재 이후 이례적으로 기업들의 기부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마윈이 수장으로 있는 알리바바그룹이 2억 5000만 위안(약 464억 원)으로 가장 큰 규모의 기부금을 선뜻 내놨고, 이어서 텐센트, 바이트댄스, 디디추싱, 메이퇀, 핀둬둬 등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1억위안(약 186억 원)씩 동참했습니다. 이윤 추구를 하는 기업이더라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겁니다. 최근 ESG가 세계적 흐름이 된 점도 무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거액을 투척한 여러 기업들 사이에서 눈길을 끈건 3억원대 기부금을 낸 글로벌 패션 브랜드 H&M이었습니다. 스웨덴에 본사를 둔 H&M이 중국에서 발생한 수재에 기민하게 반응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H&M은 2020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소수민족의 강제 노역으로 제품을 생산했다는 의혹을 받은 중국 면사 기업 화푸 패션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 소비자들의 거센 불매 운동을 겪어야 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부금을 낸 겁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기업은 또 있습니다. 스포츠용품을 판매하는 ‘훙싱얼커(鴻星爾克)’라는 중국 토종 기업입니다. 훙싱얼커는 허난성 대홍수 소식에 어려운 경영 실적에도 5000만위안(약 97억원)어치의 구호 물품을 지원했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의 기부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기업 규모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무리한 액수였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훙싱얼커는 전화위복을 맞습니다. 생방송 플랫폼 하루 방문 고객이 800만명으로 늘어나고 덩달아 매출도 52배나 폭증한 겁니다. 최악의 재난 속에서 홍싱얼커는 졸지에 ‘애국 기업’으로 추앙받으며 기사회생했습니다. 

‘애국 기업’ 마케팅의 기원

중국의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애국의 기준은 공산당이 제시하는 방향성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진핑 주석이 2020년 10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강조한 ‘공동부유’ 개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3년까지 전 인민의 공동부유를 실현하겠다는 중장기 목표인데요.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후 마오쩌둥이 ‘공부론’을 제시한 이래 역대 지도자들은 이 공동부유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자본주의를 극도로 경계한 나머지 중국은 모두가 함께 빈곤해지는 ‘공빈’에 이르렀습니다. 대약진운동 이후에는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그 뒤를 이어 일어난 문화대혁명은 사회적 불만의 폭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문화대혁명 이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공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선부론’을 주창하며 개혁개방을 주도했습니다. 선부론은 인민의 공동부유를 실현하기 전 단계로, 일부가 우선적으로 부유해지는 걸 용인하는 개념입니다. 자본주의의 틈을 열어준 겁니다. 그러자 중국은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동시에 빈부격차라는 또 다른 부작용을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때문에 시진핑의 ‘공동부유론’은 마오쩌둥이 제시했으나 성취하지 못 했던 공부론을 실현하기 위한 거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선부론의 혜택을 입고 부를 축적한 대다수의 기업들은 이제 부를 나눠줘야 할 주체가 됐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국유 기업의 비중이 높은 데다 사기업일지라도 공산당의 협조 없이는 성장하기 힘든 구조다 보니 중국 정부의 공동부유를 향한 의지는 기업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이 허난성 기부 행렬에 동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부를 선취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재해 지역과 재해민에게 기부하는 모습, 이보다 더 슬기롭게 ‘공동부유론’에 화답하는 그림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운하열이 부른 기부금 문화

공동부유론은 점차 심해지는 중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에 대한 대응책이지만 역사적인 맥락도 있습니다. 과거 물난리가 났을 때 지금의 기업에 해당하는 당시 상인들도 적극적인 기부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대운하를 유지⋅보수하는 데 막대한 금액을 투척했는데요, 이는 명과 청의 집권자들이 운하에 가졌던 애착 때문입니다. 당시에 운하는 수도 베이징으로 곡물을 운송하는 유일한 수로 교통로였습니다.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운하가 막히면 베이징은 공황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권자들은 운하를 가로막는 홍수나 황하의 범람이 발생할 때마다 긴장을 할 수밖에 없던 거죠. 

수백명의 사람이 노동 중
청 후기 황하의 치수 작업에 동원된 군인과 노동자

문제는 대운하 유지⋅보수 비용이 막대한데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에 한번이라도 재해가 생기면 대운하 유통망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당시 예산에서 물관리에 대한 충분한 지급 여유분이 없었기 때문에 당국은 물난리가 날 때마다 민간 사회의 ‘자발적인’ 협력에 기댔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지역 엘리트인 사대부 계층의 협조와 공의를 기대했습니다. 공의를 중시하는 사대부들이 지역사회의 현안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도시 사회는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농촌 사회와 달리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이 혼재된 데다 유동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에선 사족(士族) 계층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경제력을 장악한 상인층의 영향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게다가 송나라 이후 인간의 욕망을 중시하는 양명학 계열의 심학이 확산되면서 인식 변화도 생겼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욕심나는 자금줄이었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상인들이 지역 사회에 개입하기 시작한 건 송나라 때 지역 사회 엘리트로 군림하던 신사층의 위상이 손상되고 지배층이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 크게 구속받지 않던 만주족으로 교체되면서부터입니다. 상인들과 지배층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 이념의 벽이 낮아진 거죠. 운하 도시인 양주에 청군이 입성했을 때 이에 재빠르게 호응한 이들도 문인 사대부가 아니라 외지에서 진입한 상인들이었습니다.

양주에 사업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휘주 상인들 중에는 청나라 초기 각종 공익사업과 구휼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왕조 교체의 동란기에 무너진 학교나 사찰을 재건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양육하는 육영당 건립을 주도하면서 상인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며 공공선에 대한 목표 의식을 공유했습니다. 

강과 건물

태초에 황씨와 정씨 집안이 있었다

휘주 상인들은 만주 지배층의 필요를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동란 직후 운하의 물자 유통을 빠르게 정상화시켜 새로 정복한 남방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수로 교통에 기부를 집중한 것입니다. 

1665년(강희 4년) 발생한 거대 해일로 무너진 40km에 달하는 제방인 ‘범공제’가 재건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휘주 상인 황가패(黃家珮)와 황선(黃僎) 그리고 정양입(程量入)은 제방 보수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지역 사회의 치수 체계를 정비할 책임이 있지만 재정적 부담을 느끼던 지배층의 복심을 읽어낸 것이죠. 동시에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민들의 환심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들 휘주 상인은 삼번의 난(1673∼1681)이 발생할 때에도 기부금을 헌납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청조를 도왔습니다.

강희제의 남순 시기에도 휘주 상인은 운하 보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며 집권층의 ‘운하열’에 적극 부응했습니다. 휘주 잠산도 출신 정씨 가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명나라 말 휘주를 떠나 회안으로 이주한 정씨 가족은 양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황하가 범람해 회안 일부 지역이 수몰되자 나랏돈을 빌려 운하 준설을 주도했습니다. 그 공로로 정씨 집안은 회안 지역민으로 입적되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정증(程增)은 양자강과 연결된 10km에 달하는 대운하 지류 망도하를 준설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해 당시 황제인 강희제에게 관직과 어서(임금이나 황제의 글씨)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서를 받는 대상이 고위 관료나 유명 종교 시설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인으로서 정증이 받은 혜택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정증은 황제의 어서를 통해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지역 사회에 드높였고, 관료와 대면해 지역 현안을 논의할 자격을 확보했습니다. 지배층의 ‘운하열’에 대한 ‘슬기로운’ 기부를 통해 상인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엘리트 자리에 올라간 겁니다.

확실한 보상 메커니즘

기부 활동은 당시 상인들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급공의서’ 즉, ‘공익에 열심히 기여함으로써 관직을 하사 받는다’는 보상 메커니즘은 오랜 역사의 교훈입니다. 앞서 언급한 정씨 집안과 강희제의 사례처럼 상인들의 기부 행위에 당대 지배층은 적지 않은 반대급부를 제공했습니다. 

기부가 지역 사회의 좋은 평판을 이끌어내 결국 상업 활동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 심리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오늘날 ‘애국 기업’ 마케팅처럼 17세기 상인들은 아름다운 기부와 평판 상승을 연결하는 마케팅 전략을 쓴 겁니다. 특히 수로 교통의 요지에서 운하 말뚝을 제거하거나 물에 빠진 이들을 구조하는 ‘구생선(救生船)’ 운행을 위한 기부는 사회적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보증 수표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제고된 평판과 신뢰도가 다시금 활동 무대인 지역 상계(商界)에서 지배 구조의 강화로 이어졌으니, 지역 사회와 상인 모두 상부상조인 셈이죠. 

휘주 상인은 돈은 잘 벌지만 인색하다는 평가가 만연했는데요, 명나라 말 소설에서 “휘주인은 관리와 여색에만 돈을 아끼지 않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인색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런 휘주 상인들을 향한 박한 평가는 수재 등 어려운 지역 현안에 기부를 하며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18세기 양주에서 휘주 상인들이 신사층을 압도해 지역 엘리트로 정착할 수 있던 것도 돈을 잘 버는 것보다 잘 사용한 덕분입니다. 어찌 보면, 400여년 전 중국 상인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ESG 경영에 상당한 민감도를 갖췄던 걸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적절한 기부일까?

치수와 관련된 기부는 대체로 순기능을 발휘할 때가 많았지만 결말이 좋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과도한 기부로 파산 지경에 처한 상인들처럼요. 대표적으로 삼번의 난으로 재정이 부족해진 청조는 소금에 매기던 세금을 늘리고 각종 명목 기부금을 부유한 염상에게 강요했는데요. 이에 적지 않은 상인들이 경영을 포기하고 회안과 양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건륭제 치세 시절 황제가 양주에 방문할 때마다 접대를 도맡으며 염상계의 태두 역할을 했던 휘주 상인 강춘도 말년에 과도한 기부금 출연으로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기부 활동의 핵심은 기부자의 ‘자발성’에 있습니다. 기부금이 과다하든 동기가 이해타산적이든 기부자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뤄진다면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겠죠. 문제는 기부자의 자발성을 넘어서는 과도한 기부를 강요하는 데 있을 겁니다. 더구나 기부의 용처가 지역사회의 공적 용도를 벗어나 집권자의 사적 취향에 편향될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 중국 정부의 공동부유론 주창에 따른 기업들의 기부 행렬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요? 사회적 순기능으로 작용할지, 기업 이미지와 경영에 패착이 될지 관심을 갖고 두고 볼 일입니다.

✍🏻 조영현 :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 취득.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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