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의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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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완의 IT산업 나우

미∙중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의 앞날

새로운 사실: 최근 미국 상무부는 세계 1위 스마트폰 업체이자 1위 통신장비 업체인 중국 화웨이에 대한 추가 제재안을 고시했습니다. 제재안의 요점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화웨이와 계열사에 반도체 설계도와 칩을 판매할 때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9월 중순이면 이 제재는 실제로 효력을 발휘합니다.

구체적인 내용: 미국은 1년 전에 미국 기술과 그 기술을 이용한 제품을 화웨이에 수출할 땐 미국 산업보안국의 승인을 받게끔 했는데요. 실효성은 적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에만 적용되는 제재였기 때문입니다.  화웨이는 미국 바깥에서 제조되는 반도체를 구매해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내놓은 제재는 수위가 더 높습니다. 미국 바깥에서라도 미국 기술을 사용해 <화웨이가 설계한> 반도체를 만들어 화웨이에 납품할 땐 미국 상무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지만, 원천 기술은 여전히 미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핵심 장비는 미국, 일본 것을 많이 쓰죠.

미국은 왜 외국 기업을 건드리는 거예요?: 화웨이가 미국의 타깃이 된 것은 휴대폰 때문이 아니라 통신장비 때문입니다. 화웨이는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 1위 공급자이지요. 미국은 몇 년 전부터 중국 정부가 화웨이의 통신장비에 백도어 등 해킹 툴을 설치해 기밀을 빼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화웨이나 중국 정부는 강하게 부인하고 있죠. 비록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미국으로서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에 화웨이를 타깃으로 삼고 있습니다.

국내 업계엔 타격 없다: 저렇게 큰 중국 업체를 미국이 제재하면, 반도체를 파는 한국 입장에서의 손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15%를 차지하는 한국 1위 산업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울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투자하신 수많은 주주 분들도 걱정이 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행히 아직은 국내 기업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를 주로 만들어 파는데요. 미국은 이번에 메모리 반도체 수출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화웨이의 설계도를 받아 비메모리 반도체(저장이 목적인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반도체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CPU, AP, 센서 등등입니다)를 생산해주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다른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를 생산 대행해 주는 것을 파운드리라고 부르는데요.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 사업을 하지 않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삼성전자는 세계 2위 파운드리 업체이긴 하지만, 화웨이 의존도가 그리 높지 않습니다. 화웨이는 세계 1위인 대만 TSMC에 파운드리 물량의 대부분을 맡겨왔습니다.

화웨이는 어떻게 될까?: 화웨이는 반도체 생산시설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통신장비와 휴대폰 등에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으로부터 구매하고 있습니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퀄컴, 브로드컴 등으로부터 완제품을 구입하거나 직접 설계해 파운드리 업체에 위탁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메모리 반도체 완제품을 미국 기업으로부터 직접 구매하는 것은 이미 지난해 1단계 조치로 인해 차질이 빚어진 상황입니다. 이제 9월부터 파운드리를 활용한 생산마저 제재 대상이 되면서 비메모리 반도체들을 조달하기 더 어려워졌습니다. 화웨이는 2년 치 재고를 확보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화웨이의 스마트폰, 통신장비 판매가 심대한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화웨이 앞에 남은 선택지: 먼저, 화웨이가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미국 외의 기업, 즉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미디어텍 등으로부터 AP(스마트폰의 중앙처리장치) 완제품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뿐만 아니라 비메모리도 생산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제품이 AP와 이미지센서입니다. 또 하나는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인 SMIC를 통해 위탁 생산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떤 방식을 택하든 기존에 TSMC가 생산하던 물량을 100%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생산능력 측면에서도 그렇고 기술력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통신장비와 휴대폰 모두 생산량이 줄어들 걸로 예상됩니다.

한국 기업이 노릴 수 있는 기회: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기회와 위기가 공존합니다. 삼성전자의 경우 화웨이가 차지하고 있던 통신장비, 스마트폰 시장의 일부를 잠식할 좋은 기회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감시망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TSMC가 수주했던 화웨이의 파운드리 수요를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웨이의 생산이 감소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수요 역시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삼성전자가 화웨이의 파운드리 수요를 적극적으로 수주하기에는 미국의 눈치가 보이는 상황입니다.

전망: 마지막으로 다소 먼 미래가 될 수도 있고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시나리오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1년 후인 2021년 5월 15일에는 화웨이에 대한 3단계 제재안이 발표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3단계 제재안이 고시된다면 지난 5월 발표된 2단계 제재안에서 <화웨이와 계열사가 직접 설계한>이라는 문구는 삭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메모리 반도체도 대상에 포함되므로 한국 기업들도 큰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메모리 기업 입장에서 화웨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빅 바이어’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기업들의 화웨이 통신장비 사용을 일부 허용하는 완화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는 5G 표준 경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한 미국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로비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화웨이나 중국 기업들의 첨단 기술 확보를 저지하려는 기존의 정책 방향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저지한다는 전략의 틀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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